DirTy™의 일본이야기/DirTy™의 일본생활기

9. 군마, 일상, 변화

DirTy™ 2016. 10. 19. 15:36

군마
군마 오오이즈미 마치. 이곳에서의 생활은 나에게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일단 군마에서는 내가 타던 오토바이를 도둑 맞았다. 일본 혼다에서는 도난 당하면
80% 였던가 돈을 대주는 보험이 있어서 다행히 20%돈만 지불하고 같은 오토바이로
받을 수 있었지만 쓸데없는 돈이 들어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또, 지내면서 가장 힘들었던건 사람. 회사에서가 아니면 사람을 볼기회가 많이 없었다.
지하철역은 토부 코이즈미선의 니시코이즈미 역에서 내리면 되었는데
난 이곳에서 한량짜리 열차를 처음봤다. 한량짜리 열차에도 사람이 없다.
친구놈이 우리집에 있으면서 했던 말이... "야, 밖에 사람 지나간다" 였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어딜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가끔 마실이라도 나가서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볼수 있는것은 편의점 근처에서 정도였다.
가령 내가 슈퍼를 가도 오토바이로 5분, 회사는 오토바이로 10분, 구청에 볼일있어서 가도
오토바이로 10분... 써놓고 보니 먼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사실 걸어다니면서 구경할 것도
없는 이 거리에서 저정도의 거리는 정말 멀게만 느껴졌다.(구글로 검색해보니 보통 3km 이상의 거리네)
돌이켜보면 엄청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은데 당시 초반에는 너무 힘들었다.
사실 산요전기에서 일하게 되면서 업무적인 스트레스는 정말 없었다.
대기업이다보니 워낙 문서가 잘되어있고 일본인 특유의 내일만 잘하면된다 라는 마인드도 강한 곳이라
내일만 잘하면 칼퇴근도 보장되었고 휴식시간도 전혀 터치 받지않고 지낼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문화에 대해 잘 몰랐던게 식사 문화.
한국사람들은 진짜 혼자 먹는 걸 꺼려하는데 여긴 아주 당연하게 혼자 먹는다.
회사내의 구내식당에서도 혼자먹는 사람도 많았고 특히 남자들끼리 있는 부서는 같이 먹는 부서가
거의없었다. 또 단한명 뿐인 외국인인 내가 같이 밥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애매했고 왠지 주눅이 들었다.
그렇게 밥을 혼자 1년정도 먹었던 것 같다. 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트레스성 원형탈모증이 왔다.
이후에 도저히 안되겠어서 사수에게 이야기해서 밥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이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외국인이라 대하기가 쫌 어려웠고
얼마 못버티고 그만 둘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후로 급격히 친해져서 밥,술 놀러도 다녔다.
사람이 먼저 다가가야지 다가오길 기다리면 끝도없다는 걸 이때 처음 깨달았다.


일상
출근이 8시10분 퇴근이 4시55분이었던 업무시간 때문인지 정말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는데
너무 시골이라 할게 없었다. 동네자체가 외국인이 많은 동네라 구청에서 일본어강좌 같은것이
있을 것 같아 찾아보았다. 일단 찾아보니 꽤나 많은 강좌가 있었고 찾아가보니 한국인은 나혼자
중국인 브라질사람 등등 꽤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다. 대부분 초급 강좌였는데 초급강좌를 듣기에
나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어 강좌를 하는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한 후 1:1로 교습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 또래의 아주머니 셨는데 일주일에 2번정도 스터디를 위해 만나면 혼자 있는게
딱해 보였는지 항상 직접만든 반찬을 싸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도 고마운 분이다. 감사합니다(_ _)
한달정도 스터디를 진행 하다보니 이제는 딱히 강좌를 안듣고 혼자 공부해도 된다고 하셨다.
... 회화도 어느정도 잘 되고 글쓰는거야 혼자 노력하면되는거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실 일본어 공부보다는 너무 시간이 많이 남아 심심하던 차에 찾아서 간거라 공부에 대한 의미보다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컸다. 이때 선생님에게 혹시 여기서 한국어강좌를 나같은 외국인이
가르칠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물론 된다고 하셨다. 시간당 얼마씩 돈도줄 수 있다고 했다.
심심하던 찰나에 잘됐다 싶어 하고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런 시골에서도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많았던 건지 의외로 10여명정도의 사람들이 듣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고 그렇게 한국어 강좌를
열수 있게 되었다. 약 2개월동안 한국어 강좌를 했었는데 이때 남을 가르치는 일이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50대 이상이었는데... 아줌마, 아저씨들이 숙제를 너무 안해온다.
예습, 복습도 안하신다. 결국 한국어에 대한 총체적인 강좌는 무리라는 생각에 나중에는 실전 회화?
정도만으로 계속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이 강좌로 인해 동네에 아는 아줌마, 아저씨가 생겨서
지내는 동안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ㅎㅎ
주말에는 회사에서 농구 동아리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입하여 농구를 즐겼다.
산요전기안에 체육관이 있었는데 실내 농구장 시설이 있어서 운동하기에도 아주 쾌적했다.
쉬는날도 많았던지라 오사카, 닛코, 쿠사츠, 센다이, 필리핀 여행도 참 많이도 다녔다.
년에 한번씩 사내에서 마라톤 대회겸 놀러도 갔었고 또 년에 한번씩 농구동아리에서도
합숙(무슨 선수도아닌데 ㅋㅋ)이라는 핑계로 1박2일 놀러도 갔었다.
지인에게 스모경기 티켓을 받아 스모경기도 보러간적이 있고 남들 다가보는 디즈니랜드, 디즈니씨도
가보고 친형이 두번이나 놀러와 고급 온천에도 가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편안한 시간은 소리소문 없이 지나갔다.

 

변화
일단 친구녀석이 일본에 온지 1년도 못버티고 제대로 된 일도 한번 못해보고 돌아갔다.
하필 리먼쇼크 터진해에 와서 취직하기도 어려웠고 알바만으로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을 수도 있겠다.
가기전에 군마의 우리집에서 1~2달 가량 지냈었는데 못내 안타까웠다.
친구가 한국으로 귀국후 군마에서 지낸지 1년정도 됐을 때 스트레스성 원형탈모증을 겪었고
여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문의를 해서 이사를 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회사 출퇴근 버스가 쿠마가야역(사이타마현)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쿠마가야역 인근에 집을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군마에서는 레오팔레스에서 살았다. 다좋은데 집이 너무 좁았다. 이사할 집은 좀 큰집으로 이사하자고
생각한후 이사를 가게된곳이 키타코노스라는 역근방에 있는 UR임대주택 이었다.
UR임대주택은 부동산소개비,레이킹(사례비),보증회사등이 필요없고 입주가 간단하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은데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분들도 대부분 UR임대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그렇게 키타코노스역에서 도보로 3분거리에 있는 3룸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한달 월세는 아주 저렴했다.
그큰방에 5만엔대였으니 말이다. 이사를 가서도 그큰집에 혼자 있으니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지내던 찰나 리먼쇼크 후에 연봉을 계속 안올려줘서 짜증이 나있었는데 연봉이 올라야 정상인데
파견을 보내는 회사에서 나에게는 아무 소식도 안전하고 내돈을 빼먹었던 걸 알게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둬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때 참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좋지 않은 기억이다.
월급인상 이야기는 산요 사람들과 친해진 후 회식때 산요의 과장에게 전해들었다.(사실 나에게 말하면 안되는 내용이긴함)
어찌됐든 2011년 2월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지인과 함께 홋카이도에 리프레시 여행을 다녀왔다.
또, 오사카에서 지내던 친한 형님에게 도쿄로 들어가서 같이 회사를 알아보자 라고 설득하여 형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도쿄로 올라올 준비를 한다. 나도 부동산을 알아보며 동경쪽에 집을 알아보았고 재취업을 위해서 분주히 노력중일 때
2011년 3월 11일 사건이 터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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